고양이를 사랑한 아티스트 5인의 화폭에 담긴 '고양이 예찬'.::고양이,안미선,성유진,박활민,배기철,김래환,엘라서울,elle.co.kr::
이상을 향한 순진무구한 눈망울, 시시각각 구겨지는 다채로운 표정,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매력. 고양이가 나비를 쫓듯, 예술가는 고양이를 좇는다. 온전히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들에게 마음을 뺏긴 예술가들이 고양이에게 바치는 그들 각자의 오마주.
안미선 _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안미선에게 고양이는 ‘나와 너’의 구별을 잊게 하는, 장자의 나비와도 같은 존재다. 어릴 적에 고양이랑 놀다가 학원을 땡땡이쳐 어머니에게 얻어맞기 일쑤였다는 작가는 마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나쓰메 소세키가 그러했던 것처럼 고양이를 분신 삼아 자신의 욕망을 활기차게 재생시킨다. 나쓰메가 고양이의 눈을 빌어 타인의 내면을 날카롭게 꿰뚫어 봤다면, 안미선은 고양이의 몸짓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우아하게 드러내는 셈이다. 앞발을 살짝 들어 올리거나 엉덩이를 요염하게 뒤트는 동작만으로도 그는 고양이의 (혹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줄 안다. 어린 아이의 호기심과 세상에 달관한 이의 여유를 동시에 지닌 그 이중의 욕망 말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실크 천 위에 수를 놓고, 세필로 채색하는 방식을 통해 고양이에게 질감을 부여한다. 미술평론가 김윤섭은 그의 고양이를 두고 “박제된 정물이나 조형적인 구성만을 고려한 대상물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주인공”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보드라운 털들이 올올히 살아있는 안미선의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화폭 위로 튀어오를 듯한 생동감을 지녔다. 여기에 전통 동양화의 요소가 끼어들면서 그림은 한층 신비롭고 오묘해진다. 자개, 경대, 꽃처럼 오리엔탈적인 오브제와 여백의 미를 적절하게 활용한 공간 배치는 동양화 특유의 화려하면서도 사색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성유진 _나는 생각한다, 고로 고양이다
광대 분장을 한 고양이들이 침통한 얼굴로 제각각 상념에 빠져 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묵직해지는 풍경이다. 소파에 앉아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하거나, 몸을 웅크린 채 뜻 모를 슬픔에 젖어있거나, 하여튼 그의 고양이들은 죄다 가엾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뇌에 휩싸여있다(오죽 생각이 많으면 몸보다 머리가 더 무겁다). 칙칙한 회색빛 털을 가진 저 휘청휘청한 ‘인간 고양이’가 마음을 잡아끄는 건 사실 그래서다. 우울증, 강박증, 불면증 등 현대병이란 현대병은 모조리 짊어진 듯한 표정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웬만큼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고서야 모종의 동요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으름’과 ‘여유로움’이라는 천성을 버리고 기꺼이 사유의 세계로 미끄러지는 성유진의 고양이들은 그렇게 전복의 쾌감을 선사한다. 소품과 배경에 담긴 내러티브도 흥미롭다. 그림 속에서 고양이가 머무는 공간은 축 처진 녀석들의 눈꼬리만큼이나 풍성한 감정을 전달한다. 분신과도 같은 봉제 인형이 등장해 음울한 공기를 형성하는가 하면, 비현실적으로 삭막한 창밖 풍경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안에서 고양이는 언제나 슬퍼하거나 체념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양새지만, 그럼에도 고양이는 또한 공간 전체를 장악한다. 그들의 시선이 그곳에 없는 까닭이다. 불교미술을 전공한 작가는 고양이의 시선을 저 멀리 피안의 세계로 던져놓는다.
박활민 _고양이 가라사대
2001년 엘지텔레콤 카이 홀맨을 탄생시킨 디자이너 박활민. 서른셋에 직업인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인도로 건너간 그는 티베트와 네팔, 다시 인도를 거치며 3년의 ‘인생 방학’을 보내는 동안 고양이의 영험한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일 없이 삶의 풍경을 차분하게 관조하는 고양이는 수도승처럼 여유로웠고, 신통하게도 치유력마저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홍대 앞에 ‘쌀집 고양이’라는 커리 가게를 차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 홍대 앞 문화 게릴라들의 아지트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그는 ‘이장님’으로 불리며 5년째 ‘삶 디자이너’로서 전방위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다. 인도의 게스트하우스를 그대로 본 딴 가게에는 여행 중 촬영한 길고양이 사진과 직접 그린 고양이 그림이 너풀너풀 걸려있는데, 가게 중앙에는 아예 공간을 따로 마련해 커다란 돌고양이를 놓고 신전처럼 꾸며 놨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서 고양이란 영감의 원천이요, 영혼의 활력소다.
박활민의 고양이는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서투른 외양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세상 다 산 노인처럼 속 깊은 잠언을 쏟아낸다. “우리들은 병들 때를 대비해서 일을 하지만 정작 그 일 때문에 병이 드는지는 모른다.”, “여행의 목적은 돌아온 후이다.”와 같은 촌철살인의 아포리즘은 고양이라는 전령을 거쳐 지친 마음을 다독다독 두들겨준다. 그의 블로그(http://blog.naver.com/ramo_/)에 가면 더 많은 전언을 하사받을 수 있다.
배기철 _소녀가 고른 고양이
마냥 팬시하기만 한 고양이 그림에 물려갈 무렵, 배기철의 고양이를 만났다. 그리스 미코노스섬 주민들이 창문가에 슬쩍 얹어놨을 법한 그림이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지중해의 여유를 잔뜩 머금은 그의 고양이는 귀엽기보다는 신비롭고, 사랑스럽기보다는 영특해 보였다. 일필휘지로 완성된 고양이는 단순하지만 세련된 맛이 있었고, 아크릴 물감으로 꼼꼼하게 채워진 배경은 화려하지만 유치하지 않았다. 외국작가들의 웬만한 작품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색감과 디자인이었다. 육십을 넘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년 같은 얼굴을 한 배기철 작가는 아파트 앞 주차장 승용차 밑의 길고양이에게 선뜻 먹이를 주고, 흰 고양이의 꼬질해진 발을 보며 아릿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다. 미술 뿐 아니라 디자인, 건축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해온 이 재주 많은 화가가 얼마 전 고양이 그림을 몇 점을 모아 소박한 개인전을 가졌다. 놀라운 것은 큐레이터가 열두 살 소녀였다는 점이다(국내 최연소 큐레이터임이 틀림없다). 바둑알처럼 단단한 눈망울을 가진 소녀는 천진스러운 안목으로 30여 마리의 고양이를 직접 ‘픽업’했다. 그의 그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급(?) 고양이도 종종 등장한다. 미국 스펜서 마을에 희망을 불어 넣어준 도서관 고양이 '듀이', 임종을 예견한다는 고양이 '오스카'등이 그것이다.
김래환 _의뭉스러운 현대인의 초상
복고풍 선글라스를 쓴 고양이 한 무리가 떼 지어 스트레칭을 하는가 하면, 쫄쫄이 팬츠를 입고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기도 한다. 조각가 김래환의 고양이는 익살맞고 해학적이다. 내숭은커녕 민망할 만큼 당당하다. 그의 최근작인 상암DMC아트펜스에는 이런 작가의 유머감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총연장이 1킬로미터가 넘고 높이가 5미터에 가까운 광대한 수직캔버스 위에 그는 복잡하고 다양한 심성을 가진 인간 군상을 고양이로 의인화해 표현했다. 작업해야 할 펜스 안에 유명 방송국이 들어선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TV가 아우르는 온갖 다종다양한 상황들을 생생하게 오려붙였다. 6미터에 이르는 고양이 조각을 이음매 없이 세우고, 액자 속에 액자를 넣어 오브제 비틀기를 반복하는 힘겨운 작업을 거쳐 50여 개의 에피소드가 펜스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살풍경했던 공사용 펜스는 발랄한 고양이들 덕에 일회적 장치에서 예술 작품으로 거듭났다.
김래환의 조각은 마치 사람 탈을 쓴 고양이 같다. 몸만 사람인 게 아니라 얼굴까지 그대로 빼다 박았다. 그럼에도 얼굴의 절반을 덮은 선글라스 때문에 속내는 사뭇 의뭉스럽기만 하다. 작가는 드러내기보다는 의인화해 감추고, 가만히 암시함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는 “사람들은 산업사회 이후로 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나 조직에 빨리 적응하며 유연한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그 속도와 기교는 더욱 정예화되고 학습되어져 또 다른 유전인자로 자리매김할 만하다.”고 말한 바 있다. 가만히 보면 김래환의 고양이들은 한결같이 몸짓은 유쾌하나 표정은 시니컬하다. 고양이가 현대인과 닮은 건 독립심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