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 Jin, Sung-불안바이러스-신양희.pdf
고양이에어리언의 탄생
● 인간과 동물을 결합한 이미지, 반인반수는 신화와 전설을 통해 등장했던 숱한 이미지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인간의 욕망을 차마 인간적인 차원에서 표현할 수 없어, 날 것 그대로의 동물적이고 야생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대입시키려는 문명의 소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어, 늑대인간, 소인간, 새인간, 말인간 따위는, 모두 인간화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존재들, 즉 동물과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우회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다른 존재와의 결합을 통해 인간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은 사실, 현실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약하며 매우 불안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유진이 만들어낸 캐릭터, 고양이인간 역시 인간존재의 불안을 보여준다. 고양이인간은 온 몸이 털로 감싸져 있지만 인간의 신체, 얼굴, 손, 발 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적인 신체들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과장된 눈과 기이하게 변형된 몸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의식이 통제하지 못한 잉여들, 즉 고통을 보여준다.
그런데 작가는 불안을 굉장히 안정적인 구도로 잡아낸다. 사실, 불안을 안정적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데, 대부분의 작품에서 캐릭터는 화면의 중심을 점하고 있다. 때문에 정적인 공간과 대조적으로 변형된 신체는 불안을 극대화 한다. 변형된 신체를 통해 불안을 표현하는 것, 그 중에서 불안을 내면화하는 대표적인 장치가 바로 ‘눈’이다. 〈자화상〉연작에서 알 수 있듯이 ‘눈’은 아무 것도 응시하지 못한 눈, 동공을 지워버린 눈, 여러 방향을 동시에 응시하는 눈, 때로는 눈을 감아버리기도 한다. 또한 〈눈물〉이란 작품에서 눈물은 ‘눈’ 외부로 떨어지지 못하고 내부에서만 흘러내리게 된다.
한편으로 ‘눈’과 달리 성유진에게 몸은 통제가 불가능한, 무의식이 스멀거리는 장이다. 〈절름발이〉, 〈불안 바이러스〉, 〈거꾸로 추락하다〉, 〈생산적 구토〉, 〈눈물〉에서 텅 빈 외부공간은 과잉된 무의식을 압박하지만, 꺾어진 관절과 흐물거리는 살은 신체의 유기적인 흐름을 방해하며 불안을 온 몸으로 드러낸다. 더군다나 사지가 찢겨 나간 〈자기소외〉라는 작품에서 쏟아 나오는 것은 피가 아니라는 것, 억압받던 무의식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고양이인간은 불안을 극복하고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은 자연히 통증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이야기를 추출해 낼 수 있는 작품 〈희미한 희망〉, 〈나의 방〉, 〈고통〉에서 잘 나타난다. 〈나의 방〉에서 뜯겨져 나간 벽과 바닥의 중앙에 놓인 서랍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인간의 시선은 외부로 나가는 계단을 향해 있다. 또한 〈희미한 희망〉은 온 몸에 불안을 안고 있는 고양이-인간과 왼쪽 창문틀에 앉아 있는 고양이-새가 붉은 실은 물고 있는 장면을 연출한다. 갇힌 방 안의 고양이-인간, 인간을 넘어서려 하지만 좌절되고야 마는 현실의 불안들. ● 이러한 불안이 정점에 달하는 작품은 〈고통〉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고양이-인간은 스스로 수술용 침대가 되어서 몸속으로 액체를 투여받는다.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이 액체가 외부에서 몸으로 들어오는 것인지 아니면 몸 안에서 액체가 생성되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인지가 모호하다. 어쩌면 이 액체는 의식이 감당하지 못하는 이물질들, 오이디푸스기를 겪는 과정에서 철저히 탄압받던 몸의 잉여물들이 귀환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저하는 것, 그래서 고양이인간은 고통스럽다.
세상이 요구하는 인간, 보편적 질서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고양이인간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아닌 길을 선택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매끈한 주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온몸은 비틀어지고 발진으로 시달리게 된다. 고양이인간은 작가가 만들어 낸 독특한 캐릭터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결코 작가의 것이 아니다. 어쩌면 고양이인간은 무의식을 철저히 통제하며, 사회화된 인간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세계에서, 불안한 주체들의 통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 신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