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진_서울시립미술관 난지스튜디오_2009.8.17
내 안에 존재하는 나의 초상들
- 성유진의 회화를 읽는 또 다른 상징
2005년 인도의 북부 비하르 주 아라리야 지역에서 수족이 여덟인 아이가 태어났다. 팔이 네 개 발이 네 개인 이 아이는 힌두교의 여신 락시미를 닮았다 하여 락시미 타르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락시미는 팔이 네 개 발이 두 개인 여신으로 풍년과 행운을 상징한다. 타르마는 락시미의 환생이라 불리며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타르마는 이십오만쌍의 쌍둥이 중에서 한 쌍이 태어날 만큼 희귀한 경우의 삼쌍둥이일 뿐이다. 이 아이는 결코 농사를 관장하여 풍년을 불러오는 신비의 힘을 가진 바 없고 오히려 기형적으로 붙어있는 미성숙 된 한쪽을 제거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불행을 안고 있었다. 실제로 타르마는 27시간의 긴 수술 끝에 네 개의 수족을 절단했고, 현재 물리치료를 받으며 새 삶을 살고 있다. 타르마의 이야기는 육체적으로 동일한 두 개의 ‘나’란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내부의 이야기는 어떨까?
그림 1. 힌두교의 여신 락시미 그림 2. 락시미 타르마의 CT촬영 사진
우리는 흔히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을 두고 다중인격자라 부른다. 이 다중인격의 의학용어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이다. 해리성 장애는 한 사람 안에 둘 또는 그 이상의 각기 구별되는 정체성이나 인격이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진 바 없으나 어렸을 때 충격적인 사건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그런데 이 장애의 증상이 흥미롭다.
성격간의 이동은 때로는 매우 급작스럽고 드라마틱하게 이루어진다. 환자들은 각각의 성격에서 경험한 것들을 일반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성격의 존재를 완벽하게 인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본인이 아닌 친구 같은 남으로 경험하기도 한다. 성격은 성을 달리 할 수도 있고 원래 가족의 기원과 다른 인종과 나이를 가지기도 한다.
예술적 상상을 덧붙여 본다면, 해리성 장애는 우리가 장애 상태에 노출되지 않고 있을 경우 누군가는 여러 인물의 삶을 살거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타르마처럼 육체적으로는 다중이 될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란 얘기다. 뿐만 아니라 그 다중적 인격이 다른 인종과 나이를 가지기도 한다니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다중인격에 비해 상당히 폭이 크지 않은가.
다중인격의 현현은 대체로 신격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인도 힌두교의 신들은 인간형상의 기형적 성질들을 두루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경우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고, 재생의 신 비슈뉴 역시 네 개의 팔을 가지고 있다. 종의 기원을 무색케 하는 반인반수의 형상도 부지기수다. 인간형상의 왜곡된 지점에서 신성이 발아하는 이 특이성과 그 내부의 다중적 정체성, 이것은 다만 힌두교의 종교적 특질이 아닌 어쩌면 우리 현대인의 감추어진 페르소나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성유진 회화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이 부분 즉 내면에 드리워진 다중적 인격과 그 실체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미 몇 해 전에 출현한 바 있었던 삼쌍둥이 형식의 ‘복수의 자아’를 올해 본격적으로 천착했다. 작품 속에서 한 인물은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다른 한쪽과 더불어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다중인식은 이 둘을 남남으로 상정하지 않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완전히 ‘하나’의 상태로 본다는 것이다. 그의 복수 자아는 다중적일지라도 다시 ‘하나’로 수렴되는 특이한 양상을 내포하고 있는 셈인데, 아마도 그 이유는 그의 증상이 육체의 기형적 상황도 아니고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는 상태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보다 분명한 사실은 그의 장애 인식은 미학적으로 전환된 지점에서 다시 재맥락화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에 관한 첫 번째 글에서 그의 회화적 형상을 이렇게 풀이한 바 있다.
形
성유진의 형形은 고양이다. 그리고 이 고양이는 작가의 분신이며, 회화적 화자話者이다. 그의 일획은 고양이를 닮은 비현실적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출발한다. 반복과 지속의 리드미컬한 긋기와 형상의 아웃라인을 놓지 않으려는 의식의 집요한 긴장이 만들어 낸 이 인물은, 침적된 내면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 옛 화가들의 초상이 전신사조傳神寫照의 미학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인물의 정신을 포착했다면, 성유진은 의인화의 방식으로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의 시각적 실재, 즉 이 인물이 고양이를 얼마나 닮았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내면의 실체를 최대한의 형상으로 구축하기 위해 획을 그었고, 결과적으론 동거동락同居同樂의 일상을 공유했던 자신의 도반道伴 ‘고양이’로 표현되기에 이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글에 노출된 ‘침적된 내면의 트라우마의 투영’과 ‘의인화의 방식’ 그리고 ‘형의 시각적 실재’, ‘내면의 실체를 최대한의 형상으로 구축’하려 했던 성유진의 형상론은 그의 작품이 외연보다는 내연에 더 깊게 관련되어 있음을 증거한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렇듯 심리적인 상황을 파고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나는 그가 직접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예술가로서 매우 불안한 상태의 심리적 상처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가 예술가로서의 길을 가기 전에는 영화 <김씨 표류기>의 여주인공처럼 거의 히키코모리 상태였다고 한다.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ひきこもり), withdrawal]는 “사회로부터 도피하여 자택에 틀어박혀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않은 현실, 불쾌한 사람들, 장소, 집단과 멀리하기 위해 방에 틀어박혀 외부에 나가지 않는다. 때때로 그들은 식사나 화장실을 가기위해 나올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밤낮이 역전된 생활을 하거나 인터넷 중독에 빠져 지내기도 한다. 성유진이 겪어야 했던 히키코모리 또한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외부와 소통할 수 있었던 창구는 오직 인터넷뿐이었다. 그 세계에서 그는 메시아의 흔적을 찾아야 했고 심지어 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까 인터넷이 그를 파멸로 이끈 악마적 도구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를 다시 세상으로 이끌었으며 예술과 만나는 접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성유진의 회화에서 발견되는 복수 자아의 흔적은 해리성 장애와 히키코모리의 절묘한 교집합 즉 사회적 소외에서 비롯된 다중적 인격의 실체일 수 있다. 그는 수없이 다른 내가 아니라 나의 나인 나들을 상상했고 그런 나의 나들을 창출했다. 오직 나의 나여야만 나를 보듬고 사랑하고 슬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수의 자아를 그린 작품들이 끔찍한 기형적 형상이 아닌 것은 그 둘이 하나의 몸과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장애를 뛰어넘는 미학적 전환의 플랫폼이다. 그 의미는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나를 증오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나로 인해 나이다”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첫째 나는 나를 증오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내 안에 나 이외의 인격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배타적이거나 이기적 존재들로 가득 찬 내면은 증오의 카오스를 피워 올릴 뿐이다. 그가 그 스스로를 망명시켜 오직 유일하게 찾아낸 것이 회화이다. 하여 그는 ‘나’의 분신이자 의인화 된 고양이를 통해 나의 실체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실타래에서 한 줄의 실을 뽑아내듯이 그는 느린 시간을 즐기며 한 올 한 올 자아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화면 앞에 서면 너무도 정직한 선들로 인해 현기증을 느낄 정도이다. 그것을 놓치는 순간 카오스는 그를 낚아챌 것이 분명하다.
둘째 나는 오직 나로 인해 나라는 자각은 고양이도 뿔도 꽃도 풀잎도 모두 나의 편재된 사물들이라는 것을 뜻한다.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는 편재된 자아인 셈이다. 하여 그의 화면엔 그렇게 소급되고 호명된 이미지들이 떠돈다. 고갱의 흔적이나 프리다 칼로의 상흔조차도 이곳으로 호명되어 재배치된다. 선禪의 정원에서 구도자는 ‘오직 나’라는 공안에 휩싸인다. 그 ‘오직 나’는 ‘모든 나’로 확장되면서 선의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에게 있어 회화는 모든 나로 확장되는 유일한 출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회화야 말로 하나의 증상이며 장애일지 모른다.
성유진은 전보다 더 많이 편안해 진 듯하다. 우선 작품들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최근 1~2년 사이의 작품들은 초기작과 달리 너무도 명쾌하고 질서정연하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선들이 만들어 내는 초상의 완결성도 낮지 않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의 내면은 거친 항해를 지속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예술가는 어쩔 수 없이 샤먼의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시대와 현실에 대한 전위적 사유와 불온의 일탈을 꿈꾼다. 그것은 삶의 카오스를 온 몸으로 견디어 내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삶은 결코 온전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적인 평온은 예술가에게 약일 수도 있고 독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 진리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만이 알 뿐이다. 성유진의 초기작들이 그 혼돈의 자기 정체성을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라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추구하는 미학적 지향의 증거일 수 있다. 황폐한 내면의 극점에 가 본 자만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수 있다는 모리스 블랑쇼의 교훈을 되새겨 봄직 하다.